예산 임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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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산 임존성은 충청남도 예산군에 위치했던 산성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다. 백제 멸망 후 귀실복신, 도침 등이 임존성을 중심으로 부흥군을 이끌었으며, 흑치상지 또한 합류하여 세력을 키웠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맞서 30일간 저항했으나, 흑치상지 등의 배신으로 함락되었다. 이후 임존성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는 대흥현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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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임존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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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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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예산 임존성 (禮山 任存城) |
영문 명칭 | Imjonseong Fortress, Yesan |
위치 |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산8번지 |
상세 정보 | |
지정 번호 | 사적 제90호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면적 | 937,686m² |
소유 구분 | 국유, 사유 |
시대 | 삼국 시대 |
문화재청 ID | 13,00900000,34 |
설명 | |
특징 | 둘레 약 3km |
2. 지리적 특징
예산 임존성은 예산군 대흥면, 광시면, 금마면 등 3개 면의 경계를 이루는 봉수산 정상부에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백제 멸망 후 일어났던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예당저수지, 삽교, 예당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험한 산세에 위치하여 북쪽 곡창지 방어에 유리했다.[1]
2. 1. 자연 지형
예산 임존성은 예산군 대흥면, 광시면, 금마면 3개 면의 경계를 이루는 봉수산 정상부에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현재 사적 제90호로 보호되고 있다. 백제의 주요 성 가운데 하나이며, 백제 멸망 후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거점이 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임존성이 있는 봉수산은 산세가 험하고 예당저수지, 삽교, 예당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형으로 공격하기 매우 어려워, 주로 북쪽 곡창지 방어를 목적으로 구축된 산성으로 보인다.[1]
2. 2. 주변 환경
예산 임존성은 예산군 대흥면과 광시면, 금마면 등 3개 면의 경계를 이루는 봉수산 정상부에 구축된 테뫼식 산성이다. 현재 사적 제90호로 보호되고 있다. 백제의 주요 성 가운데 하나이며, 백제 멸망 후 일어났던 부흥운동의 거점이 된 곳으로 전해진다.임존성이 위치한 봉수산은 산세가 험하고 예당저수지, 삽교, 예당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형으로 공격하기 매우 어렵다. 이러한 지형적 특성 때문에 주로 북쪽 곡창지 방어를 목적으로 구축된 산성으로 보인다.
3. 역사
경덕왕 때 당풍 이름으로 고치면서 임존성은 임성군(任城郡)으로 바뀌었다. 인근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과 오산현(烏山縣)의 두 현을 거느렸다. 신라 말에는 후백제에 속했는데, 고려 태조 8년(925년) 10월에 유금필(庾黔弼)에 의하여 함락되고 형적(邢積) 등 3천여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고려 초에 임성군의 이름은 다시 대흥군(大興郡)으로 바뀌었고, 현종 9년에 운주(運州) 영내에 딸린 군현이 되었다가 다시 명종 2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조선 태종 13년에 대흥현으로서 현감이 파견되는 고을이 되었는데, 임존성 안에는 우물이나 샘이 없었으며, 인근 대잠도(大岑島)에 소정방의 사당이 있어서 봄과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3. 1. 백제 시대
예산 임존성은 백제의 주요 성 가운데 하나로, 백제 멸망 후 부흥운동의 거점이 된 곳으로 전해진다. 봉수산의 험한 산세와 예당저수지, 삽교, 예당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지형 덕분에 공격하기 어려운 요새였다. 주로 북쪽 곡창지 방어를 목적으로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대동지지》에 따르면, 임존성은 둘레가 5,094자이고 넓이가 3백...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성 둘레가 2,450m에 달하는 백제 시대 최대 규모의 산성이었다. 성벽은 외벽은 돌로, 내벽은 돌과 흙을 섞어 쌓았고, 안쪽으로는 7∼8m 정도의 내호가 둘러져 있다. 성의 네 구석은 다른 곳보다 약 2m 정도 더 두텁게 쌓았다. 남문은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있으며, 방형 옹성을 설치했던 흔적과 폭 2.3m의 성문 흔적이 남아 있다. 성벽에는 폭 70cm, 높이 90cm의 배수구를 설치하고 그 위에 판석을 덮었다. 성의 서북쪽에는 폭 6m의 북문터가 남아 있다.
정상부에는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평탄면이 조성되어 있고, 남벽 쪽으로도 넓은 평지가 있다. 이곳에서는 백제 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기와는 대체로 무늬가 없거나 선무늬가 새겨진 회백색 또는 붉은 기와가 대부분이며, 모래가 섞인 것도 있다. 토기는 회청색 경질로, 표면에 승문과 격자문이 새겨져 있다.
임존성은 《일본서기》에는 '임사기산'(任射岐山)이라고도 표기되었으며, 백제의 오방 가운데 서방(西方)을 관할하던 방성(方城)이었다.
3. 1. 1. 백제 부흥운동
660년 의자왕 20년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한 뒤, 귀실복신과 도침의 주도하에 임존성과 주류성(周留城)을 근거로 모여든 백제 부흥군 세력은 사비성(泗沘城) 회복에 실패한 뒤 임존성에서 전열을 재정비하여 당나라 군대에 맞섰다.[1] 《삼국사기》 및 《당서》에는 백제가 멸망할 당시 항복했던 흑치상지가 이후 무리를 거느리고 백제 부흥군에 가담한 곳도 이곳 임존성이었으며, 열흘 만에 3만 명이 모였다고 기록되어 있다.[1] 신라는 660년 8월 26일에 임존성 공격을 시도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1]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이 궤멸되고 백제의 다른 성들이 항복한 뒤에도 지수신(遲受信) 등이 지키는 임존성은 신라군의 공격에도 30일 동안 함락되지 않았다.[1] 이는 임존성의 험준한 지세와 견고한 성벽, 그리고 풍족한 식량 때문이었다.[1] 그러나 당나라에 항복한 흑치상지 · 사타상여 등에 의해 임존성은 마침내 함락되었고, 지수신이 고구려로 망명하면서 백제 부흥운동은 끝이 났다.[1]3. 2. 고려 시대
경덕왕 때 당풍 이름으로 고치면서 임존성은 임성군(任城郡)으로 바뀌었다. 인근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과 오산현(烏山縣)의 두 현을 거느렸다. 신라 말에는 후백제에 속했는데, 고려 태조 8년(925년) 10월에 유금필(庾黔弼)에 의하여 함락되고 형적(邢積) 등 3천여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고려 초에 임성군의 이름은 다시 대흥군(大興郡)으로 바뀌었고, 현종 9년에 운주(運州) 영내에 딸린 군현이 되었다가 다시 명종 2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3. 3. 조선 시대
경덕왕 때 당풍(唐風) 이름으로 고치면서 임존성은 임성군(任城郡)으로 바뀌었다. 인근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과 오산현(烏山縣)의 두 현을 거느렸다. 신라 말에는 후백제에 속했는데, 고려 태조 8년(925년) 10월에 유금필에 의하여 함락되고, 형적(邢積) 등 3천여 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고려 초에 임성군의 이름은 다시 대흥군(大興郡)으로 바뀌었고, 현종 9년에 운주(運州) 영내에 딸린 군현이 되었다가 다시 명종 2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조선 태종 13년에 대흥현으로서 현감이 파견되는 고을이 되었는데, 둘레 244의 임존성 안에는 우물이나 샘이 없었으며, 인근 대잠도(大岑島)에 소정방의 사당이 있어서 봄과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4. 구조
예산 임존성은 예산군 대흥면, 광시면, 금마면 3개 면의 경계를 이루는 봉수산 정상부에 있는 테뫼식 산성이다. 사적 제90호로 지정되었으며, 백제의 주요 성 중 하나이자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으로 알려져 있다.
봉수산은 험준한 산세와 함께 예당저수지, 삽교, 예당평야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공격이 어려운 지형이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북쪽 곡창지대 방어를 위한 산성으로 구축된 것으로 보인다. 《대동지지》에는 임존성의 둘레가 5,094자, 넓이가 3백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성 둘레는 2450m에 달하는 백제 시대 최대 규모의 산성이다.
4. 1. 성벽
예산 임존성의 성 외벽은 돌로 쌓고, 내벽은 돌과 흙을 섞어 쌓았다. 안쪽으로는 7∼8m 정도의 내호(垓壕)가 둘러져 있다. 성벽의 네 모서리는 다른 곳보다 약 2m 정도 더 두텁게 쌓았다. 남문은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있는데, 방형 옹성(甕城)을 설치했던 흔적과 폭 2.3m의 성문 흔적이 남아 있다. 성벽에는 폭 70cm, 높이 90cm의 배수구를 설치하고 그 위에 판석(板石)을 덮어 놓았다. 성의 서북쪽에는 폭 6m의 북문터가 남아 있는데, 이 문을 지나면 대흥면 소재지에 이른다. 성벽은 대체로 높이 2.5m, 폭 3.5m이며, 성벽 상단부 폭은 1.6m 안팎이다.4. 2. 건물터
정상부는 평탄면이 조성되어 있어 건물이 자리했을 것으로 생각되며, 남벽쪽으로도 넓은 평지가 조성되어 있는데 이곳에서 백제 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1] 기와는 대체로 무늬가 없거나 선무늬가 새겨진 것으로, 태토가 고운 회백색과 붉은 기와가 대부분이다.[1] 기벽은 대체로 얇고 그중 모래가 섞인 것도 있다.[1] 토기는 회청색 경질에 비교적 태토가 고우며 표면에는 승문과 격자문이 시문되어 있다.[1]4. 3. 배수 시설
성벽에는 폭 70cm, 높이 90cm의 배수구가 설치되어 있고 그 위에는 판석을 덮어 놓았다.5. 출토 유물
예산 임존성에서 발견된 백제 시대의 토기와 기와 조각들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종류 | 특징 |
---|---|
기와 | 대체로 무늬가 없거나 선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고운 흙으로 만들어진 회백색 또는 붉은색이다. 두께는 얇은 편이며, 일부는 모래가 섞여 있다. |
토기 | 회청색의 단단한 재질로, 비교적 고운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표면에는 승문과 격자문이 새겨져 있다. |
5. 1. 토기
임존성에서 출토된 기와는 대체로 무늬가 없거나 선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고운 흙으로 만들어진 회백색 또는 붉은색을 띤다. 기와 두께는 얇은 편이며, 일부는 모래가 섞여 있다. 토기는 회청색의 단단한 재질로, 비교적 고운 흙으로 만들어졌으며 표면에는 승문과 격자문이 새겨져 있다.[1]5. 2. 기와
기와는 대체로 무늬가 없거나 선무늬가 새겨진 것으로, 흙(태토)이 고운 회백색과 붉은색 기와가 대부분이다. 기와 벽은 대체로 얇고 그중 모래가 섞인 것도 있다.6. 현대의 임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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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웹사이트
Imjonseong Fortress in Yesan
http://jikimi.cha.go[...]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of Korea
2014-09-13
[2]
서적
고등학교 국사
(주)두산
2004-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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